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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인과 이식인

탄휘야 미안하고, 사랑한다

  • 2019. 0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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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너의 사랑은 영원히 꽃다운 청춘으로 

이 세상에 머물겠지”

- 뇌사 장기기증인 김탄휘 군의 이야기 -





강원도 원주의 한 하우스 농장에서 생명나눔의 두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지난 2012년, 열 아홉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뇌사 장기기증으로 새 생명을 선물한 故 김탄휘 군의 부모 김기성, 용선주 씨. 따뜻한 햇살아래 탐스럽게 익어가는 열매처럼 누군가의 삶 속에서 생명의 열매가 되어 있을 탄휘 군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아빠의 결정은 옳았어요. 아빠의 뜻에 따를게요.”

2010년,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왔던 김 씨는 퇴직을 선택하고 제2의 인생을 계획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귀농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 건데요. 


“이 하우스 농장도 탄휘와 함께 지었어요. 이곳 농장에 곳곳은 탄휘와의 추억이 가득해요.”


유기농 농산물을 재배하는 일을 시작한 김기성 씨는 늘 자신을 도와 궂을 일에도 함께한 아들 탄휘 군과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귀농했을 무렵, 탄휘 군은 열아홉 살이 되어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창창한 미래를 그려야 했을 탄휘 군은 더 이상 청춘을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2월, 사업 준비 차 강원에서 서울을 오가며 교육을 받고 있었던 김기성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지금 쓰러져서 병원에 이송됐고, 당장 뇌수술을 해야 하는데 가족의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의료진의 긴급 전화였습니다. 가족이 모두 외출한 상황에서 홀로 집에 쓰러져 있던 탄휘 군을 어머니 용선주 씨가 뒤늦게 발견한 것입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뇌출혈로 인해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쓰러지기 하루 전날 밤에도 아빠와산책길을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건강한 아들이었는데.... 어찌 이런 상황이 아들 탄휘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생긴 것인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아들아, 제발 힘을 내어다오. 제발 다시 깨어나주렴.’

아들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김기성 씨는 서둘러 병원을 찾았고,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에도 탄휘 군의 의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주길, 탄식이라도 한 번 해주길 바랐지만 탄휘 군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누워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돌아온 것은 탄휘 군이 뇌사 상태로 추정된다는 의료진의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이었습니다. 의료진의 장기기증 권유가 있었지만,하루아침에 의식을 잃어버린 아들을 보며 부부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실에서 투병하던 한 초등학생 아이 역시 뇌사 상태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 초등학생의 부모가 아이의 장기기증을 결정하고, 마지막 배웅을 하는 모습을 본 뒤, 부부에게 장기기증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같은 병실을 쓰던 아이가 장기기증을 하게 된 사실이 저희 가족에게 큰 울림이 되었죠. 한 겨울에 차디찬 무덤에 탄휘를 묻을 수는 없잖아요. 꽃다운 청춘이었던 탄휘의 삶이 그냥 멈춰지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죠.”


김기성, 용선주 씨 부부의 고귀한 결정으로 2012년 2월, 열아홉의 잘생기고 멋진 아들 탄휘 군은 간과 각막을 기증해 3명의 생명을 살리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아들 탄휘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어요.”

한참 비트박스의 매력에 흠뻑 취해 쉬지 않고 연습하던 탄휘 군은 교내 및 교외 공연에도 참가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흥도, 정도 많았던 탄휘 군은 김 씨 부부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갑작스레 아들을 잃은 슬픔에 아내 용선주 씨는 미국 유학 중인 딸에게 가서 1년 반의 시간을 보냈고, 아버지 김기성 씨 또한 아들과 함께 시작했던 농사일에 몰두하며 절망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들은 어느날 본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도너패밀리에 초대 받은 김기성 씨는 지난 2014년, 강원도 영월에서 진행된 소모임을 찾아 특별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마 제 스스로도 이 슬픔을 이겨낼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나누지 못했던 제 자신을 위해 도너패밀리 소모임을 찾게 됐죠. 작년 아들의 얼굴을 그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에요. 다 그리고서 아들의 사진을 펼쳐 보니 그림과 아들의 얼굴이 똑같은 거예요. 마음이 아주 뭉클했습니다. 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가족과 함께하고 있다고 느끼게 됐죠.” 


다음 소모임에는 김기성 씨, 용선주 씨 부부가 함께 참석했습니다. 아내가 표현은 하지 않아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기성 씨가, 아내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도너패밀리 모임에 거듭 참여하며, 용선주 씨 역시 위로를 얻었습니다. 


"올해는 아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호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잔잔하게 위로를 얻었어요. 탄휘의 생명을 선물 받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떠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애틋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탄휘가 했던 마지막 말을 곰곰히 곱씹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습니다. 


"탄휘가 저희의 결정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요? 의식을 잃기 전 날 탄휘는 산책을 하며 그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건네주었어요. ‘아빠 나는 아빠의 결정을 존중하고, 아빠가 옳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이죠. 제 인생과 제 선택을 응원해준 그 아이의 한마디가 장기기증을 결정한 후 더욱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영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누군가의 삶속에서 살아있을 탄휘에게 여전히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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